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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경북=작가초대석] 안동사람 김석현(3) -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

 

지금까지 그토록 청빈하게 작은 벌레 하나에 까지 만물을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셨던 분은 권정생 선생, 그분이셨어!

 

선생님 생가엘 가보자며 나의 눈치를 보던 김석현이 일어서며 하던 말이다.

 

선생님이 일직교회 문간방에 기거하고 계시던 때 김석현네 집 논이 송리동 일직예배당 앞에 있어 매일 드나들며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고 했다.

 

방안에 책이 가득차 있었지만 글을 쓰신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동네 아저씨로 알게된 선생님으로 부터 책을 권유 받게 되었고 어떤때에는 그런 이야기로 한참을 머물기도 하며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 심지어 생활방식 까지 조언을 듣게 되었다.

 

 

한참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일반 시중에서 판매되거나 얻어 볼 수 없는 선생님 만의 책을 아무런 생각 없이 훑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 선생님 곁에서 책에 대하여, 그 책을 쓴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러던 어느날.

 

언제 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이런것이 시요, 글이라면 저도 글을 쓸 수 있겠네요!"라며 선생님께 말씀 드리자 "쓰면 되지!"라며 흔쾌히 허락 해 주신 그날 이후 김석현은 그런 비슷한 글을 흉내내며 하나 하나 다듬어 지게 되었다고 했다.

 

 

일직으로 가는 차안에서 김석현은 아무말도 없었다.

 

내가 묻지 않아서 였겠지만 김석현의 표정과 곧 스스로 들려 줄 권정생 선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서로에게 좋은 방법이라 기다려 줬다.

 

 

저앞에 일직예배당이 보이길레 "예배당엘 먼저 들릴까?" 하니 선생님 살던 집으로 곧장 가자고 했다.

 

5분이라도 빨리 와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입구엘 왔는데 마당 한가득 노란리본이 나풀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선생님!!" 하고 무릎을 꿇을뻔 했다.

 

왜 이렇게 오랫만에 오느냐며, 기다렸다며 반가이 맞아 주시는 것 같았다.

 

"늘 이렇게 소일하며 지내지..."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저 앞에서 김석현이 방명록을 들추더니 "오늘도 많이들 다녀 가셨네!"라고 한다.

 

선생님 사시던 마당 한가득 노란리본을 메어 주신 많은 분들을 떠 올려 본다.

 

그런  김석현이 마당 앞 바위에 걸터 앉아 저멀리 예배당쪽을 바라본다.

 

 

 

 

 

"영화감독 김기덕을 좋아 하셨지" "된장에 김치에 손수 식사해결을 하셨고" "허름한 옷한벌에 고무신을 신으셨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아 외가가 있는 경상도 청송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던 중 먹고사는 문제로 삼촌(남촌어른)들이 안동에 있어 안동 일직으로 오게 되었으며 동생 결혼 문제로 집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이유는 선생이 폐병을 앓게 되어 집안 문제가 될까 비켜 나간것이라 했다.

 

그이후 대구로 어디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 다시 일직에 와 터전을 잡은 곳이 일직예배당 이었다고 한다.

 

 

 

 

 

김석현과는 19살 차이가 나는 동네 아저씨 였으니 김석현이 선생의 뼈아픈 청년기를 이해 하기에는 어렸고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아저씨로 여겼다는 것이다.

 

후일 알게 되지만 집사님으로 불리던 선생의 본명이 권경수. 후일 권정생 선생님인 것이다.

 

선생이 글을 써 이곳 저곳 투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봉화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셨던 이오덕 선생님이 선생께서 권선생의 문학성을 인정해 배려해 주셨는데 어느날 덮고 주무실 이불하나 없던 선생을 위해 이불을 사 짊어 지고 오시는 등 보살폈다고 했다.

 

일직에 골프장이 들어설 무렵 주민들 편에서 언론에 기고를 하고 대책위 위원으로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등 주민들을 격려 했다고 한다.

 

그런때에 김석현은 기독교 농민회에 참여 유기농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런 속에서 유기농을 하게 되면 화학비료를 사용치 않아 결국 우리땅을 살리게 됀다는 것이 엉뚱하게도 농민들이 잘사는 방법에,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며 김석현을 감시하고 방해를 하자 김석현이 반발하게 되는 과정에서 글을 써서 농민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김석현이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속에는 늘 생명, 평화(전쟁반대)를 소원했던 권선생의 가르침이 스며들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쯤의 선생은 원고를 부치러 일직장터에 있는 우체국까지 30여리 걸어서 다녀 오시곤 했는데 아무리 덥고, 배가 고파도 한눈 팔지 않고 집과 우체국, 우체국에서 집으로 오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일직면사무소까지 쌀을 받으로 다녀 오실때에도 마찬가지셨다고 했다.

 

그정도로 아끼고 집념이 강하셨다고 했다.

 

그런 모습에서 김석현이 깨닫게 된것이 생명주의, 평화주의 사상이었다고 했다.

 

김석현은 신동엽의 '금강',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접했을 때 "시속에 뭘 담을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풀었다고 했다.

 

"시에도 형식이 있구나!" 했다는 것이다.  

 

 

"나도 글을 쓸수 있겠네요!" 라고 했을  때 그런 글들이 얼마나 반갑고 사무쳤을까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후일 선생님은 '밭 한뙈기'라는 글에서 "이세상 모든것은 모두의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권정생 선생인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한참후에 그런 위대한 스승을 만났구나 눈물 흘렸다고 한다.

 

또한 김석현이 더욱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것은 선생이 남긴 엄청난 유산을 목도했기 때문이란다.

 

한푼도 안쓰고 애써 모은 거액이 세상에 알려 지던 때 주변 모두가 놀라고 아쉬워 했지만 김석현의 마음속엔 "진정한 성인(聖人)"을 잃었다는 슬픔에 가슴 아파 했다고 했다.

 

 

김석현은 83년쯤 실천문학에 투고를 했지만 그때마다 올해의 심사평에서는 거론이 되었지만 등단하지 못했고 어느날 권선생께서 "글을 쓸때는 거짓말을 하지 마라" "진실을 쓸때 감동을 준다"며 격려 했다고 했다.

 

84년 등단을 하게 되는데 그때 '누구 누구 작품은 좋긴한데 채택이 안됀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위대한 스승을 뵈러 일직 예배당, 일직장터 우체국을 둘러 보며 끝내 유언대로 선생님 사시던 뒷동산 빌벵이 언덕에 뿌렸던 그런 날들이 바로 어제처럼 스쳐 지나 가고 있다고 했다.

 

 

해가 지고 있다.

 

우리가 서둘러 간 곳은 이제 막 준비를 끝낸듯한 선생님을 기리는 문학관 '권정생 동화나라'

 

바로 저앞에 '권정생 선생님'이 계신다.

 

 

 

 

 

얼마후 몰려 올 아이들이'권정생 선생님'을 외치며 저 마당을 뛰어 갈것이다.

 

몇날 며칠 머무르며 선생님의 이야길 이어 갈 것이다.

 

 

그런 김석현을 등뒤에서 지켜보며

 

'김석현이 저곳에 있었으면...' 했다.

 

저토록 그리워하는 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김석현을 알아보고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를 김석현이 들려 줄 그날을 떠올려 본다.

 

이른 아침 대빗자루로 동화나라 마당을 쓸고 있을 김석현이를 말이다.

 

종지기 셨던 권정생 선생님 처럼 동화나라 마당쇠로 불리워 질 그날이 기다려진다.

 

 

* 권정생 선생임 이야기 뉴스경북' 기사, 사진은 허락 없이 사용하셔도 됩니다

 

  위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진,글 뉴스경북 김승진)

 

 

 

                      뉴스경북' 자랑스런 경북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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