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여성운동의 효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108년 만에 실체를 밝혀내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그동안 남성들에게 가려져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여성 주역인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실체를 찾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뉴스경북 취재국/김승진 기자] 대구 남일동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7부인회의 실체가 밝혀져 대구 여성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 재조명 받고 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은반지, 은장도 등을 기부해 직접적인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 당시 금연 활동에 그쳤던 초기 국채보상운동을 실질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후 1907년 2월 23일 남일동에 거주하는 7명의 부인 이름으로 취지문을 발표하고, 전국 최초로 조직적으로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전국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이 국채보상운동의 여성 참여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연구한 결과 108년 만에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전모를 밝혀내게 됐다.
이번 연구를 통해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참가 여성 중 서채봉, 정경주, 김달준,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등 7부인 가운데 6명의 이름을 밝혀냈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실체가 108년 만에 드러났다”면서, “나머지 한 명인 ‘김수원의 처 배씨’의 이름을 밝혀내지 못해 아쉽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제보가 있다면 이 역시 가능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자료제공,사업운영팀장 최세정 053)219-9973>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이름을 찾아라!
<사진설명> 대구여성가족재단이 108년만에 최초로 발굴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얼굴 사진. 이들은 전국 여성 최초로 조직을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에 은반지, 은장도 등을 기부해 전국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진은 직계 후손들로부터 구한 것으로, 왼쪽에서부터 서채봉, 정경주, 김달준 여사.
(재)대구여성가족재단은 지난 8월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첫 사례인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주자는 운동을 제안했다.
그 결과 108년 만에 7명 부인 가운데 6명의 이름을 최초로 발굴해내는 쾌거를 달성했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남성 중심으로 펼쳐지던 국채보상운동을 여성의 영역까지 넓힌 동시에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주체로 인정한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로 기억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엔 담배를 끊는 ‘3개월 단연’을 주된 방법으로 제시했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남성 중심적 운동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여성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인이라고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여성도 의연금을 내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처음 조직을 만들어 의연금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7명의 부인은 취지문을 통해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남일동의 패물폐지부인회는 전국 여성계의 첫 번째 단체이자 또한 첫 번째 패물의연 단체였다. 여기에 자극되어 전국 곳곳에서 유사한 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패물폐지부인회 구성원의 이름은 연구되지 않았고, 1907년과 똑같이 취지문에 나타났던 ‘정운갑 모 서씨, 서병규 처 정씨, 정운화 처 김씨, 서학균 처 정씨, 서석균 처 최씨, 서덕균 처 리씨, 김수원 처 배씨’ 로 불리고 있었다.
108년만에 베일을 벗다! 7부인의 이름은…
이번 연구 결과 알게 된 여성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정운갑 모 서씨는 서채봉(徐彩鳳, 1859-1936)여사. 정봉원의 부인으로, 취지문에는 유일하게 정운갑의 모(母)라는 어머니의 자격으로 등장하고 있다.
서채봉 여사의 직계후손 정우영(고손자) 씨에 따르면 “어머니로부터 들은 기억으로는, 이 할머니는 호랑이같은 분이었다. 기개가 대단하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했다.
서채봉 여사의 사진. 직계후손으로부터 확보했다.
서병규의 처 정씨는 정경주(鄭瓊周, 1866-1945) 여사로, 일부에서 최경주로 잘못 알려진 인물이다. 이번 연구 과정을 통해 정경주임을 확인했다.
정경주는 실질적으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리더이자 취지문을 직접 작성한 장본인으로 짐작된다. 서학균, 서석균(서철균), 서덕균이 정경주 여사의 세 아들임을 고려할 때 정경주 여사는 세 며느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취지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경주 여사의 고손자 서찬주 숙명여대 교수는 “할머니(정경주의 손부)의 말씀에 따르면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자들이 나와서 줄연설을 했다고 한다. 특히 정경주 할머니는 한마디를 해도 호소력있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취지문도 정경주 할머니가 쓰셨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정경주 여사의 고손자인 서헌주 미국 버지니아주 목사는 “정경주 할머니는 학식이 많으시고 절세의 미인이시며 봉건사회의 대가족을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거느리신 여장부라고 들었다”면서, “저희 할머니(정경주의 손부) 말씀으로는 정경주 할머니는 성미가 까다로워 모시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품위와 권위가 있어 진심으로 흠모하였다 한다.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아 남편이 국채보상운동에 투신하여 고군분투하실 때 자부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뛰어든 결정도 이 어른이 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로써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7부인의 중심 활동을 했던 여성이 바로 정경주 여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경주 여사의 사진. 뒷면에 ‘병인원월상한촬영’이라고 적혀있다. 정경주 여사가 60세 되던 1926년 음력 1월 10일경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후손 서찬주 소장 사진.
정운화 처 김씨는 김달준(1877-1956) 여사이다. 정운화는 국채보상운동에서 ‘정운화’로 표기되기도 하고 ‘정운하’로 표기되기도 한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비에는 ‘정운하’로 표기되어 있는데 당시 이를 보도한 신문들의 표기가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계도를 바탕으로 찾은 결과 정운화(鄭雲華)가 정확한 이름임을 알 수 있었다.
김달준 여사의 사진. 직계후손으로부터 확보했다.
정경주의 세 며느리는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이다. 정경주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서학균의 처 정씨가 정말경(鄭末慶, 1881-1932), 2남 서석균(철균)의 처 최씨가 최실경(崔實慶, 1888-1965), 3남 서덕균의 처 이씨가 이덕수(李德秀, 1889-1955)이다.
최실경의 아버지는 최대림(崔大林)으로, 대구광학회 설립에 동참해 활동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던 인물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이덕수는 대구에서 유명한 오산 이종면(李宗勉, 1870-1932)의 딸로 추측된다. 이종면과 서병규는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함께 했으며 연배도 1살 차이로 비슷해, 여러 가지 인연으로 당시 사돈을 맺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오산 이종면은 대구 협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경제인이였으며 대구광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대한협회 대구지회 활동도 기록에 보인다. 이처럼 서병규와 이종면은 대구를 대표하는 대자본가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100년을 거슬러갔던 이름 찾기의 여정
○ 달성 서씨 학유공파 족보로부터…
108년 전 이름, 그것도 여성의 이름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취지문에 나타난 남편의 성이 ‘서’씨가 많고 당시 남일동에 달성 서씨가 많이 살았던 것을 바탕으로 달성 서씨 족보에서 이들 남성들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고, 달성 서씨 학유공파에서 ‘서병규, 서학균, 서철균(서석균), 서덕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석균이라는 이름 대신 서철균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서철균과 서석균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인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아 집안의 족보인 보철을 다시 확인한 끝에 이들 4명의 부인 정경주,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학균, 서철균, 서덕균은 서병규의 세 아들이라는 점이다. 즉, 정경주 여사는 세 며느리와 함께 뜻을 같이 한 것이다. 며느리들과 함께 취지문을 발표해 국채보상운동의 여성 참여를 독려했다.
○ 족보 도서관을 뒤지다
정운갑과 정운화를 찾기 위해 연일 정씨 족보들을 수소문해 살펴보았다. 족보도서관이 있는 두류도서관에서 족보를 샅샅이 뒤져보기도 하고, 전국 각지 연일 정씨 세거지 등에 연락을 취했으나 쉽지 않았다. 오랜 기간 수소문한 끝에 연일 정씨 감무공파 족보에서 이 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운갑과 정운화는 친형제로, 정운갑은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족보에도 부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아 난항을 겪어야 했다. 이런 경우 유일한 방법은 직계후손을 찾아 제적등본을 통해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 족보 주소에 나타난 산소를 찾아가다
결국 족보에 나와 있는 주소대로 연일 정씨 감무공파 산소를 찾아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이름을 찾는다’는 내용의 홍보문을 두고 왔다. 마침 추석 전이라 후손들이 성묘를 오리라는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이 추측은 결국 맞아떨어졌고, 정운갑 직계후손에게 연락이 닿았다.
○ 직계 후손들을 찾아 헤매다
한편 정운화의 직계후손은 곧바로 알 수 없었고, 따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까지 찾아가 만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서병규의 직계 후손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이메일을 통해서 멀리 미국에 있는 후손의 증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6명의 부인 이름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이제 남은 부인은 단 한 명
이제 단 한 명, 김수원의 처 배씨만이 남아 있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정일선 대표는 “국채보상운동의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근대적 여성운동의 효시인 만큼 그 운동의 중요성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 여성들의 이름을 찾고 그 역할을 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제 6명을 찾은 만큼 나머지 1명의 부인도 대구 시민들의 힘으로 분명히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이름을 찾은 여정과 이들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북을 발간할 예정이다.
※ 참고자료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교과서, 실학서 등을 출판하던 출판사) 회의를 끝내고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1851-1913)이 건의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호응해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패물폐지운동의 취지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자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흥감케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물론 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리오”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이 다르지 않다는 평등 사상을 담고 있다.
국채보상취지서 내용이 남성 중심적 참여방법만을 제시한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여성들은 각자가 소지한 패물폐지로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이 독자적 조직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첫 운동이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발기인을 살펴보면, ‘정운갑 모 서씨, 서병규 처 정씨, 정운화 처 김씨, 서학균 처 정씨, 서석균 처 최씨, 서덕균 처 리씨, 김수원 처 배씨’라고 나와있다. 남일동 일곱 명의 여성들은 각자 은지환, 은장도, 은연화 등 총 8돈중의 패물을 내놓았다. 여자가 귀중히 여기는 패물로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겠다는 뜻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것은 여성계 첫 번째 단체이자, 첫 번째 패물의연단체이다. 대구 여성들의 이런 진취적인 움직임은 전국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다. 이를 본받아 불과 몇 개월만에 국채보상운동 여성단체 30여개가 만들어졌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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